20세기 초의 패션은 파리의 쿠튀르 하우스에서만 만들어졌고 유럽과 미국의 기성복 회사들은 그것을 모방했다고 여겨졌다. 형식적인 파리 패션은 활기차고 운동적인 미국 여성들의 삶에 맞지 않았다. 미국의 패션 디자이너 클레어 맥카델은 파리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미국 여성들을 위한 편안하고 실용적이지만 우아한 아메리칸 룩을 만들었다. 그녀의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의상은 미국 여성들을 끊임없는 피팅과 불편함에서 해방시켰고, 미국 특유의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미학을 선보였다. 클레어 맥카델의 현대적인 캐주얼 의상은 대량 생산과 전시 규제와 같은 제약 조건에서도 기성복 디자이너로서 충분히 창의적이고 경이로운 것으로 입증된다. 맥카델의 작품은 여전히 패션 디자인의 고전으로 받아들여져 빌 브래스, 루디 건..
한계는 기회를 가져오고, 필요성은 혁신을 촉진한다. 모로치는 신화가 탄탄한 토대를 가진 이야기라면 페라가모는 모든 신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페라가모의 신화적 특징은 80년 역사와 13,000여 점의 기록적인 소장품들뿐만 아니라 페라가모의 절대적인 현대성, 현대의 창조성, 비전, 과감한 혁신에서 비롯된다. 페라가모의 성공은 비단 작품의 조형적 우수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천재 디자이너 개인의 재능과 노력이 어떻게 구전 전설을 이끌어 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페라가모의 경우는 오늘날과 같이 모든 한계가 기술 진보에 의해 쉽게 극복될 가능성이 있는 풍요의 시대에 발생할 수 있는 창조적 위기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평생 신발의 구조와 재료를 실험해 온 페라가..
파리가 샤넬과 치아파렐리가 가장 위대한 디자이너가 누구인지를 논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 헐리우드에서 남성 디자이너의 영향력은 프랑스 디자이너의 영향을 능가하고 있었다. 아드리안 아돌프 그린버그는 이름을 아드리안으로 바꾸고 18세에 파리로 떠난 뒤 미국으로 돌아와 모든 스타들을 위한 가장 비싼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는 영화사 MGM의 수석 디자이너로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즐겼고, 그레타 가르보, 조안 크로포드, 장 할로우, 주디 갈랜드 등 1920년대와 30년대 할리우드 스타들의 스타일을 만들어냈고, 1940년대에 아드리안을 설립했으며, 일반 여성들을 위한 기성복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다. 이 영화에서 그의 디자인은 뉴욕 7번가의 패션 메이커들에 의해 전 세계적으로 복제되어 판매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여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