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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크리스찬 디올은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기 전 유럽사회가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벨에포치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다소 늦은 나이에 패션에 입문하여 약 8년간 쿠튀르, 로버트 피케, 루시엔 뢰롱에서 조연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자신의 작품을 개관하였다. 1946년 39세의 나이로 이름을 지어라. 1947년 사업가 마르셀 부삭의 투자로 본격적인 쿠튀르 하우스를 시작했으며, 올해 첫 컬렉션으로 파리와 전 세계를 순식간에 뒤흔들며 1957년 사망할 때까지 11년간 화려한 작품 세계를 남겨 20세기 패션사에 확고한 이름을 남겼다. 디올은 첫 봄/여름 컬렉션에서 코롤레와 후트 두 라인에 총 90개의 디자인을 발표했다. 전쟁의 영향으로 1920~30년대 복식 복식은 각진 어깨와 짧고 좁은 치마를 입고 다소 남성적으로 보였지만 디올은 여성의 경사진 어깨선을 살렸으며 허리,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풍성한 스커트로 파격적인 실루엣을 선보였다. 디올의 컬렉션은 전쟁의 힘든 나날을 마감하는 좋은 옛 시절인 벨 에포크에 대한 향수의 양식이었다.


꽃부리 모양을 한 이 스타일은 1950년경까지 유럽과 미국 전역의 높은 패션 고객들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 스타일은 원래 이름보다 뉴룩으로 더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미국 잡지 하퍼의 바자 편집자 카르멜 스노우가 말한 것이 정말로 새로운 모습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뉴룩의 성공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압력으로 황폐해진 파리 패션의 자존심을 살려주었다. 뉴룩의 성공으로 디올은 1949년 뉴욕에서 기성복 부티크를 열었으며 그 해 파리 패션으로 대미 수출의 75%, 1951년 프랑스 총 수입의 5%를 차지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디올의 판매수입의 절반이 미국으로 수출되면서 미국에서도 뉴룩의 인기는 엄청났다. 뉴룩에 대한 반응은 분분했다. 전쟁 중에는 섬유소비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풍부한 직물을 가진 뉴룩은 사치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디올은 20개의 천을 사용해 낮의 드레스를 만들었고, 이브닝 드레스의 경우 42개를 사용했다. 1947년 영국의 조지 6세가 국민들에게 의류 배급제를 시행하고 어린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가렛 공주가 뉴룩을 입는 것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디올은 왕족만을 위한 비공개 패션쇼를 개최하도록 초청받았다. 미국에서는 월스트리트저널이 연예인들이 해설자로 참여했고, 짧은 치마를 지지하는 여성들이 무릎 바로 아래 클럽을 만들어 디올 스타일에 반대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디올은 나는 여자를 알고 있다고 말하고, 전쟁으로 억눌려온 소비심리가 이런 풍부하고 화려한 스타일을 포용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디올의 전망은 옳았다. 디올은 소비자들이 아직 알아보지 못한 자신들의 욕구를 시각화해 시장에 내놓은 대표적인 디자이너였다. 뉴룩도 당시의 정치적 필요성과 일치했다. 전쟁에서 직업 전선에 섰던 여성들은 복직한 남성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따라서 남편과 자식을 아끼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여성의 낡은 이념은 뉴룩의 복고적 여성성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디올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기 보다는 꽃다운 여자는 아름답고 보수적인 여성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제로 디올은 뉴룩을 위해 가슴에서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코르셋으로 다시 여성들에게 옷을 입혔다. 디올이 만든 여성의 모습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코르셋에서 여성을 해방시킨 샤넬의 여성미와 플라퍼 드레스 밑에 감춰진 여성 인체의 곡률과 밀레니터룩을 표현한 디올의 여성미는 여성성을 규정하는 시대정신이나 이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여성스러운 디올의 뉴룩에 대해서는 샤넬의 여성미와는 달리 윌슨은 아이러니하게도 뉴룩의 뻣뻣함과 뾰족함을 기묘하게 남성적인 외모라고 불렀고, 페티시즘과 연관지어 해석하기도 했다. 디올은 뉴룩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라인을 발표함으로써 50년대 파리 최대의 쿠튀르가 되었다. 디올은 여성미가 표현되는 형태와 실용적이고 추상적인 현대 디자인의 형태를 조화시키려 했다. 1954년 뉴룩은 하지의 단축형태인 H라인을 발표하였고, 그 이듬해 H라인 하단을 넓힌 A라인이 발표되었다. 디올은 그해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A라인을 역전시킨 형상인 Y라인과 Y라인에서 허리선을 올린 형상인 플뤼허를 발표했다. 맥도웰은 후자의 대사를 샤넬의 실용성과 발렌시아의 부드러운 건축이 어우러진 디올의 표현이라고 해석했다. 그 결과 이들 노선은 60년대의 짧은 A라인 시대로 가는 노선이 되었다.


디올의 옷은 상류층 소비자들뿐 아니라 대중문화에서도 강렬한 러브콜을 받았다. 디올은 1957년 3월 4일 미국 타임지의 표지에 실렸으며, 영화배우나 연예인들을 위해 수많은 옷을 제작하였다. 그는 마를렌 디트리히가 히치콕의 영화 무대 공포에서 입었던 모든 의상을 제작했고, 마크 롭슨의 영화 선실에서 아바 가드너가 입은 14개의 의상을 제작했다. 게다가 배우 제인 러셀, 그레이스 켈리, 리타 헤이워드, 발레리나 폰테인이 디올을 입었다. 디올은 사업 감각이 뛰어난 디자이너였다. 1947년, 유명한 사업가 마르셀 부삭의 재정적인 지원으로 사업을 재편하면서, 그가 공헌한 다른 사업들에 비해 유난히 많은 자율권과 의사결정권을 획득하였다. 사업 감각만큼 사교적이지 못했던 디올은 영업부장 수전 링 등 막강한 조직과 함께 현대식 영업을 시도했다. 쿠튀르에서는 판매 담당자들이 고객들과 철저한 일대일 관계를 유지했고, 미국 기성복 매장은 단순하고 상업적인 디자인을 판매했다. 디올의 컬렉션은 언제나 새로운 스타일, 친숙한 스타일 변주곡, 입증된 고전음악의 세 가지 스타일로, 매 시즌마다 3분의 1씩 제품 구성의 기획틀을 지탱하며, 신기함과 상업성을 모두 파악한다. 디올은 쿠튀르 하우스의 라이선스 사업을 시작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1950년 넥타이를 시작으로 모피, 스타킹, 모자, 핸드백, 장갑, 보석, 란제리, 스카프 등에서 라이선스 사업을 했다. 당시 쿠튀르 하우스 이미지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쿠튀르 연합으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으나, 결국 다른 쿠튀르 하우스 회원들도 고수익을 추구하며 그 대열에 합류했다. 미국의 한 증권회사가 당시 1만 달러라는 엄청난 로열티를 지불하며 디올의 라이선스를 취득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디올은 이를 거절하고 로열티 매출의 일정 비율을 받는 형식으로 계약을 맺는 바람에 수익구조가 훨씬 좋아졌다. 디올의 죽음 이후에도 디올 하우스는 이브 생 로랑이 발표한 트라페즈 라인 등의 디자인으로 파리 쿠튀레의 주인공이 되었고, 이브 생 로랑, 마르크 보앙, 지안 프랑코 페레, 존 갈리아노 등 스타 디자이너들을 배출하며 삶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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